[장용준의 씨네노트] 수영장, 알랭 들롱의 눈동자에 건배
한국금융경제신문=장용준 기자 | 알랭 들롱의 필모그래피를 돌이켜 보면 언제나 깊고 푸르지만 차가운 눈동자 속에 비치는 자화상이 떠오른다. 그의 출세작이 된 [태양은 가득히]의 ‘리플리’에서부터 시작된 ‘줄리앙 소렐’과도 같은 야망가적 이미지는 또 하나 작렬하는 태양 아래 눈부시게 대비되는 푸른 물결과 동화된다.
알랭 들롱이 30대에 접어들 무렵 필모를 채운 또 다른 대표작으로 자크 드레이가 연출한 [수영장]은 그래서 또 [태양은 알고 있다]로 의역됐다. 혹자는 일본 영화계에서 번역된 것인 만큼 또 ‘태양’이 들어간 것 아니냐고 말하지만 당시 알랭 들롱의 이미지는 딱 ‘태양’ 아래 무슨 짓이든 벌일 수 있고 그 또한 용서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질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캐릭터였다.
작품의 시작은 프랑스 남서부의 인기 있는 휴양지 생 뜨로페 인근의 한 고급 빌라 수영장에서 시작된다. 장 폴(알랭 들롱)과 연인 마리안느(로미 슈나이더)가 한여름 태양 아래 한가롭고도 나른한 일상을 보내면서 수영을 즐기는 모습은 어딘가 부러움으로 다가온다. 언제나 그렇듯 곧 깨질 일상이지만 말이다. 실제 연인이기도 했던 로미 슈나이더가 이 무렵 그와 헤어진 이후라는 설도 있고, 한창 무르익던 관계라는 설도 있지만 작품 속 그들의 연기는 절정이다.
이같이 한창 그리스로마신화 속 12신들과 같은 애정행각을 벌이던 두 연인은 불청객이랄 수 있는 해리(모리스 로네)와 그의 딸 페넬로페(제인 버킨)의 등장으로 미묘한 갈등을 겪게 된다.
해리가 마리안느의 옛 애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장 폴의 복잡미묘한 심리는 자신이 무명에 가까운 작가라는 사실과 함께 관객의 공감을 산다. 해리 역을 맡은 모리스 로네가 [태양은 가득히]에 이어 알랭 들롱의 질투를 한 몸에 받는 주인공이 됐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의 딸로 나오는 20대 초반의 제인 버킨이 18세 소녀로 등장하지만 아직 풋풋함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이후 이들 4명의 관계는 해리와 마리안느의 거칠 것 없는 친구 관계(?)와 성공한 음반 제작자 해리의 자신만만한 언행 속에 상처 입은 두 영혼 장 폴과 페넬로페의 동지의식(?) 속 혼돈으로 접어든다.
페넬로페는 장 폴과의 대화 중 자신의 아버지 해리에 대해 어릴 적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사춘기를 지나 어른으로 가는 길목에서 성장한 자신에게 과도한 애정을 보이며 남들에게 과시하려 한다고 불만을 표하면서 특히 “남들도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안다”는 대사를 남기는데 이것이 네 사람의 ‘불안한 관계’를 이끄는 결정적 이유로 내비치기도 한다.
어느 날 자신의 애마 ‘마세라티’를 몰고 시내로 나갔다 파티 일행을 몰고 온 해리. 모든 사람이 해리 앞에서 즐거워 하지만 정작 눈길은 장 폴에게 가 있고, 그것은 마리안느와 페넬로페도 마찬가지다.
해리도 이를 알고 있지만 정작 장 폴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다. 서로에게 채워지지 않는 것을 바라는 두 남자. 그들의 대립은 극의 중후반부를 파국을 이끌고 둘만 남게 된 마리안느와 장 폴이 바라보는 창밖은 이제 철 지난 수영장만 휑하게 남아 있다.
이 작품은 훗날 프랑소와 오종이 [스위밍 풀]로 오마주 했고, 2015년에는 [비거 스플래쉬]로 리메이크되기도 할 만큼 반향을 일으켰다.
사랑과 질투, 그리고 비틀어진 욕망을 알랭 들롱 만큼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싶다. 그의 짙고 푸르면서도 차가운 눈동자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는 것이 또 쓸쓸한 가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