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준의 씨네노트] 아름다운 시절, 시대적 반어법으로 추억을 곱씹다.

2025-10-10     장용준 기자
[아름다운 시절 (Spring In My Hometown, 1998)] 사진=네이버영화

사람의 취향은 제각각이고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고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시작된 취미생활은 곧 개성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야말로 어릴 적에 본 작품이 모여 평생토록 기억된다. 그리고 어떤 영화를 누구와 함께한 것이냐에 따라 기억은 추억이 된다.

한국금융경제신문=장용준 기자 | 아름다운 시절. 흔히 자신의 과거를 아름다운 시절이었다고 추억하는 건 그만큼 현실이 척박하고 녹록지 않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이런 공식이 문학이나 영화에선 지극히 시대적 반어법으로 쓰이는 제목으로 이어진다.

1992년에 봤던 [아름다운 시절 (Belle Epoque, The Age Of Beauty, 1992)]이 스페인의 녹록지 않았던 1930년대를 코미디로 승화시킨 영화로 추억되는데 반해, 이광모 감독의 이 작품은 영어 제목인 [Spring In My Hometown]이 잘 어울리는 영화다. 저 유명한 ‘고향의 봄’이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그 순간부터 말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원형으로 이루어진 어둠이 스크린을 드리운다. 우물 덮개가 열리는 순간이다. 이는 이미 어른이 된 주인공의 동공이 확장되며 과거로 되돌아가는 순간과도 같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스물스물 형체를 이루어가는 기억의 장막이다.

처음 이 영화를 보고 저장되었던 추억의 편린 속에 감독의 이름을 ‘이광모’가 아닌 ‘이창동’이라고 착각했던 건 지극히 주관적이면서도 고장난 기억회로였다.

주인공 성민(이인)의 기억은 열두 살로 돌아간다.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맺은 해. 1952~1953년의 시대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때다. 모두가 어렵던 그 시절, 성민의 집은 미군 장교와 사귀는 큰누나 영숙(명순이) 덕분에 아버지 최씨(안성기)가 미군부대에 다닐 수 있었기에 살림이 폈다. 그런 성민의 집 아래채에 세 들어 사는 친구 창희(김정우)네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용군에 끌려가 소식이 단절된 아버지(고동업) 때문에 힘든 삶을 이어간다. 창희 엄마 안성댁(배유정)은 최씨의 배려로 미군들의 속옷을 세탁하는 일을 하게 되지만 빨랫감을 도둑맞는 사고가 생기면서 곤경에 처한다. 그리고 이를 악용한 미군 하사가 안성댁에게 요구한 건 한 차례의 관계. 평소 미군과 양공주들이 이용하던 동구 밖 방앗간에서 말이다.

전쟁이 끝났다 해도 물질적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마을. 이념의 갈등을 넘어 점령지의 수모를 동시에 겪는 마을의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공간이 ‘방앗간’인 셈이다. 그리고 빨랫줄에 줄지어 널려 마치 만국기처럼 휘날리는 미군의 빨랫감이 그렇다.

하필이면 채 사춘기가 오기도 전에 어른들의 세계를 훔쳐보는 소년들의 호기심이 우물처럼 검고 동그란 방앗간의 틈 사이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괴롭고 슬프다. 평소 미군과 양공주들의 관계를 훔쳐보던 성민과 창희가 보게 된 그 끔찍한 순간 말이다.

이 장면이 지나간 뒤 살해당한 미군과 불길에 휩싸이는 방앗간은 또 어떤 상징성이었던가. 아무런 설명이 없을지언정 사라진 창희는 또 어떤 운명을 맞은 것인가.

한 해가 흐른 1953년 여름, 늪에서 발견된 한 구의 시신. 밧줄로 꽁꽁 묶인 아이의 시신을 창희로 확신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한 성민이 친구들과 벌인 장례식 시퀀스는 참으로 무겁고 아팠다. 죽은 줄 알았던 창희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온 후 아들의 행방과 사건의 진실을 찾아 마을을 수소문하고, 성민의 누나가 미군 장교의 아이를 임신한 채 버림받게 되는 건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집안 살림을 지탱해 오던 끈을 놓치면서 불안함이 가중되던 최씨가 선택한 행동 역시 그렇다. 마치 인민재판처럼 미군들에 의해 빨간 페인트칠을 당하고 부대에서 쫓겨나는 최씨의 말로가 사필귀정이니 새옹지마니 하는 따위의 말로 설명될 수 없다는 걸 관객은 인지한다.

도망치듯 마을을 떠나게 된 가족과 함께하는 성민이 이미 장례식까지 치른 창희가 어디엔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는 건 그저 소년의 현실도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결코 아름다울 수 없었던 그 시절, 고향의 봄은 그렇게 반어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