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금융경제신문=양지훈 기자 | 지난달 국내 주식시장에서 유통되는 상장지수펀드(ETF)가 1000개를 넘어섰다. 이쯤에서 ETF 시장이 과연 ‘건강한 성장’을 이뤘는지 냉정하게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유사 상품 논란이 수년째 반복되고 있음을 고려하면 ‘기형적인 성장’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자산운용업계에서는 한 자산운용사에서 시장에 없었던 창의적인 상품을 출시하면 다른 운용사들이 유사 상품을 출시하는 패턴이 자주 발생한다. 운용액 합계 200조원을 돌파하는 등 많은 자금이 ETF 시장으로 몰리면서 운용사 간 과도한 경쟁이 빈번해졌고, 유사 상품 출시도 경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일례로 금 ETF 케이스가 있다. 한국투자신탁운용(한투운용)은 2021년 ‘ACE KRX금현물’ ETF를 상장했다. 이 상품은 금(gold) 현물에 직접 투자하는 ETF다. 한국거래소가 산출하고 발표하는 ‘KRX 금현물 지수’를 기초지수로 삼고 지수 수익률을 추종한다.
금 실물에 소액으로 투자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알려지면서 ACE KRX금현물 ETF는 금 시장 활성화를 이끌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를 토대로 한투운용은 한국거래소로부터 ‘금시장 개설 10주년 공로패’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시장 판도가 바뀌었다. 한투운용의 ETF가 투자자 사이에서 호응을 얻으면서 다른 운용사도 금 관련 유사 상품을 연이어 출시했다. 금 ETF를 내놓은 타 운용사가 한투운용보다 낮은 보수율을 제시하자 지난달 한투운용도 ACE KRX금현물 ETF의 총보수를 인하했다.
문제는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 중소형 자산운용사가 불리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ETF 상장 초기부터 대규모 매수 물량을 기록하는 대형사와 달리 중소형사는 이른바 ‘물량공세’를 펼치기 어렵다.
유사 상품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지는 실태에 대한 반응은 양분화된다. 선택할 수 있는 ETF가 많아져 투자자 관점에서는 나쁠 게 없다는 반응과 중소형 자산운용사가 설계한 테마형 ETF의 경쟁력을 우려하는 반응이다. 투자자 선택을 우선시한다면 여러 상품 중 총보수가 낮은 ETF를 택할 수 있어 나쁠 게 없지만, 한편으로는 업계의 건강한 성장을 가로막는 원인이 된다는 점도 반박하기 어렵다.
대책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사실상 유명무실한 상태다. 이른바 ‘베끼기 상품’ 출시가 만연하자 한국거래소는 2024년 2월 ‘신상품 보호제도’의 평가 기준을 개선했다. ETF와 상장지수증권(ETN) 신상품의 배타적 권리를 인정해 6개월간 보호기간을 둔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제도 개선 이후 올해 초까지 증권사와 운용사의 신상품 보호 신청은 1건도 없었다.
특정 운용사 ‘편들어주기’를 하려는 게 절대 아니다. 한 자산운용사가 기존에 없었던 참신한 ETF를 선보여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른 운용사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유사 상품을 내놓는 패턴이 자산운용업계의 동반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ETF 베끼기가 만연하는 흐름에서 탈피하려면 업계에서 자발적으로 노력하는 방법밖엔 없다. 건전한 경쟁을 표방하는 분위기가 자산운용업계에서 전체적으로 형성돼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