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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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금융경제신문=김선재 기자 | 정부가 최근 보이스피싱 예방과 내실있는 피해 구제를 위해 금융회사에 ‘무과실 배상책임’을 법제화하겠다고 발표했다. 보이스피싱 수법이 날로 고도화하고 피해 금액도 커지는 만큼 국민 개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서는 범죄 차단이나 피해 구제가 어렵다는 취지다.

범죄 예방과 피해 구제라는 방향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위한 수단으로 금융회사에 배상책임을 지우는 방식을 택한 것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정부에서는 금융회사가 보이스피싱 예방에 책임 있는 주체이니 피해액의 일부나 전액을 배상하도록 하겠다는 것인데, ‘무과실’과 ‘배상’이 동일선상에 놓일 수 있는 것인지부터 의문이다. ‘배상’은 남에게 입힌 피해를 물어준다는 의미인데, 은행이 국민을 대상으로 보이스피싱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금융회사는 의심 거래에 대해 고객이 송금하지 않도록 설득하거나 피해가 발생했을 때 계좌를 동결해 피해 확산을 막는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금융회사에 발생한 피해에 대한 배상책임을 지운다니, 과연 그것이 범죄 예방에 얼마나 효과적일지 의문이다. 은행에서 아무리 고객에게 수상한 거래라고 설명을 해도 고객이 송금 의사를 철회하지 않으면 은행이 이를 막을 수 있는 권한은 없다.

실제 법제화됐을 때의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다. 보이스피싱 피해에 대해 금융회사가 배상을 해주니 이에 대한 주의 의무가 약화될 수 있다. 또한 이 경우 금융회사의 비용 부담이 늘어나게 될 텐데, 이는 금리, 수수료 등의 형태로 금융소비자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1~7월까지 발생한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약 7992억원. 월평균 1141억원 꼴이다.

피해자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도 금융회사에 배상책임을 물을 것인지도 문제다. 정부는 영국·싱가포르 등 해외의 보이스피싱에 대한 무과실 책임을 인정하는 사례를 참고했다고 밝혔는데, 영국에서는 관련 제도 도입 이후에도 ‘중과실의 범위’에 대한 논쟁이 여전히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근본적으로 더 큰 문제는 정부가 해야 할 일을 금융회사에 전가한다는 것이다. 보이스피싱 범죄 근절에 대한 책임은사건을 수사하고 총책·조직원을 검거해야 할 경찰과 검찰, 즉 정부에 있다. 따라서 이로 인해 발생한 피해에 대한 배상책임 역시 정부에 있다.

그러고 보면 이 정부 들어 정책 추진 과정에서 금융권이 소환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정부는 ‘생산적 금융’ 확대를 요구하며 10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 조성에 금융권의 참여를 압박하고 있다. 또한 장기 연체자의 채무 탕감을 위한 ‘배드뱅크’ 설립을 위한 재원 8000억원 중 4000억원 마련을 위해 금융권에 손을 벌렸고, 교육 재정 확보를 목적으로 금융사에 부과하는 교육세 세율을 두배 인상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금융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교육세율을 두배 인상하는 세법 개정안은 최근 국무회의를 통과해 국회에 제출됐다.

돈이 필요한 곳으로 잘 흐를 수 있도록 중개하고,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분산함으로써 경제활동을 촉진하는 것이 금융의 역할이다. 금융회사는 그 과정에서 이익을 취하는 만큼 기업시민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명목으로 정부 정책 추진에 금융회사를 소환해 정부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금융회사의 리스크를 키우는 일이 될 수 있다. 금융회사의 리스크 확대는 곧 우리 경제의 리스크 확대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정부는 정책 목적 달성의 수단이 아닌 경제 활성화와 성장을 위한 동반자로서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더 집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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